현재 중동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와의 전쟁은 단순히 하마스의 테러가 원인이라고 말하기에는 매우 복잡한 역사와 종교 및 민족 갈등들이 배경에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중동국가들간 분쟁이 왜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지 정리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입장에서는 2천여년간 지내고 있던 지역에 갑자기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팔레스타인들을 추방 후 강제로 거주지역을 제한 한다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겠지요.
이스라엘 역시 과거 조상들의 나라가 있던 지역에 다시 세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매우 과격한 대응이 나올 수 밖에 없다고 보입니다.
여기에 더해 강대국들의 이권과 이슬람 종파들간의 갈등 및 이슬람 경전의 정치적 해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 하며 현재와 같은 중동의 화약고가 되었는데 그에 대한 원인과 역사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 고대 이스라엘의 멸망
- 1차 세계대전 (1914년 7월 28일 ~ 1918년 11월 11일)
- 밸푸어 선언 (Balfour Declaration, 1917년)
- 오스만 제국의 붕괴
- 비자리영 (1917년) - 허드 섭취 (1923년)
-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국의 위임 통치(1920-1948)
- 유엔 분할 계획(1947)
- 이스라엘 국가 선언(1948년 5월 14일)
- 아랍-이스라엘 전쟁(1948-1949)
- 휴전 협정(1949)
- 휴전 협정 이후 현재
1. 고대 이스라엘의 멸망
현재 이스라엘이 위치한 지역은 수세기 동안 터키 지배하의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습니다.
- 건국
건국 고대 이스라엘은 기원전 12세기 경에 모세와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고대 이스라엘족의 이주와 가나안의 유리사를 통해 건국되었습니다.
- 멸망
고대 이스라엘은 약 기원전 722년에 아샤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다왕국의 분열을 의미하는 "이스라엘 분열"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분열은 기원전 10세기 후반에 시작하여 유다 왕국(남부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북부 왕국)로 나뉘었으며, 이후 이스라엘 왕국은 아샤수르 제국에 의해 정복되어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이스라엘의 역사적 기록은 사라지고, 많은 이스라엘인이 아샤수르로 식민지화되었습니다.
2. 1차 세계대전
1차 세계대전 중, 팔레스타인 지역은 오스만 제국(오스만 터키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동안 중동 지역은 전세계적인 군사 충돌으로 인해 복잡한 상황이 발생 하게 되었습니다.
1917년 11월에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정식으로 점령하였습니다. 이를 발표한 것이 벤살렘의 알렌비 장군(General Allenby)이었으며, 이 사건은 중동 전선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3. 밸푸어 선언 (Balfour Declaration, 1917년)
시온주의자들은 옛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유대인들의 지역을 다시 회복 하기 위해 기회를 보고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 정부는 아서 밸푸어 잉글랜드 외무장관의 편지로 알려진 밸푸어 선언 (Balfour Declaration)을 발표 했는데, 이 선언은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제어하기 위함 이었습니다. 이는 나중에 이스라엘의 건국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이 선언에는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에서의 국민적 자립"을 지지하겠다는 영국의 의지를 표명하는 중요한 문서였습니다.
4. 오스만 제국의 붕괴
1차 세계대전이 종료하면서 오스만 제국이 붕괴하였고, 중동 지역의 지배 세력이 재조정되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붕괴는 복잡하고 오랫동안 누적된 요인이 있지만 1차 세계대전(1914-1918)으로 인해 더욱 가속화되었습니다.
- 1차 세계대전
1차 세계대전은 오스만 제국에 큰 부담을 안겼습니다. 제국은 중동과 바츠만 지역에서 알리의 활동과 같은 반란으로 연합군에게 패배하였습니다.
- 종교적 다양성
오스만 제국은 다양한 종교 집단과 민족적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종교적, 민족적 갈등이 붕괴를 가속화시켰습니다. 특히, 아르메니아인 대학살과 같은 학살 사건이 큰 규모로 일어났습니다.
- 정치적 부패
오스만 제국의 행정부와 정치 구조는 부패와 효율성 부족으로 특징지어졌습니다. 이는 제국 내에서 불평등과 불만을 가중시켰습니다.
- 지식과 산업 기술 부족
오스만 제국은 산업화와 지적 기술 개발에서 현대화 과정에서 뒤처져 있었으며,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 군사 작전 실패
오스만 제국은 여러 군사 작전에서 패배를 경험하였으며, 특히 갈리폴리 전투(1915-1916)와 메소포타미아 전역(1915-1916)에서 중대한 패배를 입었습니다.
- 국제적 압력
오스만 제국은 유럽 국가와 중동의 다른 국가들로부터 압력을 받았으며, 다양한 협정과 동맹이 조직되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오스만 제국은 붕괴하고, 대서양조약 기구(League of Nations)에 의해 현재의 중동 국가로 재편되었습니다.
5. 비자리영 (1917년) - 허드 섭취 (1923년)
비자리영 협정 (Balfour Declaration)은 1917년 발포르 선언을 계승하며, 영국 외무장관 발포르와 시온주의자 아이사크스 로웨와 간의 편지 교환으로 이뤄진 합의입니다.
이 협정은 영국 정부가 시온주의자들의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인 정착을 지지한다는 내용을 강조했습니다.
허드 섭취 협정은 이 협정을 발전시켜 영국에게 팔레스타인 통치를 맡기고, 유대인과 아랍인의 권리를 균형 있게 보호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6.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국의 위임 통치(1920-1948)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맹은 영국에게 팔레스타인을 통치할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아랍 민족주의의 부상과 팔레스타인의 더 적은 유대인 인구의 급속한 증가는 특히 1930년대 나치즘의 출현 이후 팔레스타인에서 아랍계 유대인들의 폭력이 증가 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은 이 문제를 유엔에 넘겼고, 유엔은 1947년 팔레스타인을 국제도시로 만들기 위해 예루살렘-베들레헴 지역과 함께 하나의 유대인, 하나의 아랍인 두 개의 주로 분할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지도부는 이 계획을 받아들였지만 아랍 지도부는 거부했습니다.
7. 유엔 분할 계획(1947)
유엔은 예루살렘을 국제적인 관리하에 두고 팔레스타인을 유대인과 아랍인으로 분리하는 계획을 제안했습니다.
이 계획은 팔레스타인을 유대인 국가와 아랍 국가로 나누되, 예루살렘은 국제 통치구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결정은 시온주의자들에게 유대인 국가의 세움을 허용하는 중요한 국제적 지지를 의미했습니다.
8. 이스라엘 국가 선언(1948년 5월 14일)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지도부는 1948년 5월 14일 국경을 발표하지 않고 영국의 위임통치가 종료되는 순간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인 다비드 벤 구리온(David Ben-Gurion) 이스라엘 국가 수립을 선언했습니다.
이 독립 선언은 유엔 분할 계획에 기반하고 있었으며, 다음날 아랍 국가들과의 군사 충돌인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팔레스타인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 이후, 이스라엘은 독립을 유지하며 국제적인 인정을 받는 나라로 발전했습니다.
9. 아랍-이스라엘 전쟁(1948-1949)
이스라엘 주변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 국가 수립을 인정 하지 안았습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 수립 선언 다음 날인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은 아랍 군대 5개에 의해 침략을 당했고, 이는 이스라엘의 독립 전쟁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 전투는 1949년 이스라엘의 국경을 따라 주변 국가들과 휴전선을 형성하고 가자 지구(이집트 점령), 동예루살렘과 요르단 강 서안 지역(요르단 점령)의 경계를 형성하면서 끝이 났으나 국경이 정해진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10. 휴전 협정(1949)
이스라엘은 주변 아랍국가들과 정전협정을 체결하여 임시국경을 규정했습니다.
11. 휴전 협정 이후 현재
1949년 이스라엘과 아랍간 전쟁 후 현재까지 이지역에서는 이스라엘의 건국이 원인이 되어 수많은 전쟁이 발생하게 됩니다.
- 1956년 스웨즈 캔세스 전쟁 (수에즈 위기)
- 1967년 육일 전쟁 (아라브 이스라엘 전쟁)
- 1973년 아랍 이스라엘 전쟁 (또는 응수 전쟁)
- 1982년 레바논 전쟁 (제1차 레바논 전쟁)
- 1987년 1차 인티파다 (팔레스타인 내전)
- 2000년 2차 인티파다 (팔레스타인 내전)
- 2006년 레바논 전쟁 (제2차 레바논 전쟁)
- 시리아 내전 (2011년 ~ 현재)
- 가자 갈등 (2021년)
※ 이스라엘과 관련하여 발발한 전쟁과 관련해서는 따로 자세한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국경의 가장 큰 변화는 1967년에 나타났는데, 6일 전쟁으로 알려진 분쟁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 가자 지구, 요르단 강 서안 지구, 동예루살렘과 시리아 골란 고원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하게 되면서 이스라엘이 통제하고 있는 영토의 규모가 사실상 3배로 증가했습니다.이스라엘은 사실상 동예루살렘과 골란고원을 병합했습니다.
이런 움직임들은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다가 미국이 트럼프 행정부에서 이 문제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바꾸면서 최초의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압도적으로 국제 여론은 동예루살렘과 골란고원을 점령지로 계속 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육상국경 중 하나는 1979년 이집트가 유대인 국가를 인정한 첫 아랍 국가가 되면서 처음으로 공식화되었습니다.이 조약에 따라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국경이 설정되었고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에서 모든 군대와 정착민들을 철수시켰으며 이 과정은 1982년에 완료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동예루살렘, 골란고원을 점령하게 되었고, 1949년 휴전선으로 여전히 국경선(이집트는 제외)이 표시돼 있습니다.
1994년, 요르단은 이스라엘을 인정한 두 번째 아랍 국가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유대 국가와의 긴 국경을 공식화했습니다.이스라엘과 레바논 사이에 아직 평화협정이 체결되지는 않았지만, 1949년 휴전선이 이스라엘의 사실상 북쪽 국경 역할을 하고 있는 반면, 시리아와의 이스라엘 국경은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도 2005년 군대와 정착민들을 철수시킨 이후 가자와 사실상 국경을 맞았지만, 가자와 요르단강 서안지구는 유엔이 점령한 단일 독립체로 간주되며 공식 국경선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요르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 동예루살렘의 최종적인 지위와 윤곽은 이스라엘 점령하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협상에서 결정될 예정이지만, 수십 년에 걸친 비공식 회담은 지금까지 성과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2014년 하마스 무장세력이 터널에서 이스라엘로 진입하는 일련의 기습공격을 감행한 이후 가자지구 주변의 국경은 터널굴착을 막기 위해 땅속 깊숙이 보안펜스와 콘크리트 벽을 설치한 반영구적인 구조물로 강화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마스 무장세력은 2023년 10월 7일, 같은 종류의 가장 큰 공격으로 지상의 보안 장벽을 다시 뚫었습니다.
※ 본 포스팅 중 일부 내용은 BBC자료를 참고 및 인용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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